프리즘을 통해 본 세상...

흔들리는 한국 천주교, 주교님 입 좀 여십시오!

지요안 2023. 10. 5. 21:34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 지나가는 아이를 붙잡고 던져보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라서 아들에게 건네는 말씀이요,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바가 있으므로 하시는 신신당부였다. 우리도 오늘 “네가 좀 다녀와야겠다” 하시는 그 음성을 듣고 있다. 내 자식이야 내 맘 알아주겠지 하시는데 ‘알았습니다’ 할까, 아니면 ‘싫습니다’ 할까? 자기가 누구인지 알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모르지 않으리라.

  지난 8월 14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월요시국기도회를 폐막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7등급 핵사고 재난이 발생했던 후쿠시마는 130만t의 방사능 폐수를 바다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장차 바다는 회복불능의 영구 오염지대로 남을 전망이다. 평생토록 <녹색평론> 하나를 키워서 죽는 날까지 “변화냐 파멸이냐?”(김종철) 하고 울부짖던 예언자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그런데 믿기 어려운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하나뿐인 일본의 패륜적 범죄를 한국이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어찌하여 일본의 핵 오염수 해양투기를 정당화하고 지원하는 ‘체제’가 이 땅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팔아서라도 욕심을 채우려는 수구기득권의 파렴치에 놀라고, 한편으로 자주독립과 민족화해, 민주주의를 위해 살과 피를 바친 분들의 희생이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진다. 하지만 어쩌랴. 혁명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수없는 반동을 극복해가며 아주 느리게 이뤄내는 성과인 것을.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방어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는 특이체질인 것을. 잘 가꾼 소나무라도 3년을 그냥 놔두면 그 잘난 수형을 잃고 만다. 자포자기나 낙심천만은 금물, 발악發惡에는 발선發善으.로.

  겉으로 볼 때 재앙의 시작은 사람의 도리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정리情理, 의리조차 배우지 못한 허풍선. 오로지 제 뱃속을 세상의 전부로 아는 허랑방탕 전직 검사의 집권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체제의 배후는 따로 있다. 그깟 ‘윤모’ 하나를 치운다고 해도 민주주의가 멀쩡해지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신봉해온 민주주의가 가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는 근대의 신화라는 논지를 전개한 책, ‘민중의 이름으로’(녹색평론사, 2022년)를 소개한다.

  “인류사회가 선거대의제를 민주주의로 오인해온 세월은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 인식은 1800년(미국 대통령선거)에 처음 선거 전략으로 등장했는데 이후 한 세기 동안 저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좇기에 바빴던 혁명가들, 신흥 중간계층, 지식인과 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주장, 포교되었고, 마침내 1920년경에 이르러 사회 일반에 수용되기에 이른다. 실제로 선거대의제는 출발부터 민중에게 권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민중의 이름으로’ 시민혁명을 주도했던 중산층계급 엘리트들은 정치적 시민적 법적 권리를 확대, 허용함으로써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정치엘리트와 금권세력이 지배하는 과두적 세계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게, 원래 민주주의를 경계하고 혐오했던 중산계급이 어떻게 해서 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가장, 참칭함으로써 권력게임의 주도권을 독점해 왔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실로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김정현)

  가짜 민주주의가 세계를 망치는 동안 교회는 수수방관하다시피 지냈다. ‘민중의 이름’으로 출현한 대의정부가 민중의 이해와 정반대로 작동하는 현실을 의심어린 눈으로 지켜보거나 걱정한 적이 거의 없다. 그랬다면 선거대의제가 곧 민주주의일 수 없음을 진즉에 간파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만한 촉이 없었다. 교회가 고유의 민감성을 잃어버렸다는 반증인데 이는 무엇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누구인지 망각한 데서 비롯한 결과다.

  한국천주교회가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 주교단의 각성과 면모일신을 정중하게 촉구한다. 민주주의가 뿌리째 뽑혀나가는 걸 보며 시민들이 잠 못 들고 탄식할 때  주교단은 오불관언吾不關焉,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주교란 원래 그런 분들이라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갈수록 심각해지는 두 가지 현상을 말씀드린다. 하나는 신부들의 개인주의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들의 방황이다. 교구장들이 더 이상 간섭하거나 제지하지 않아도 신부들은 더 이상 사회참여에 관심이 없고 현실발언조차 할 마음이 없다. 그랬다가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하고 그러잖아도 해보고 싶고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은데 무엇하러 시끄럽고 먼지 묻는 자리에 나갈 것인가. 양성 과정에서부터 고분고분 순치된 인간형을 장려하므로 새침데기 샌님들은 넘쳐나지만 억세고 당찬 인물은 씨가 말라간다. 80년대 젊은이들 상당수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눈부신 활약을 부러워하며 사제직을 꿈꾸었다. 종일토록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신부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무슨 성소가 생겨날까.

  한편 교회가 사회적 나침반 노릇하기를 거부하면서 신자들은 길을 잃었다. 후쿠시마 핵폐수처럼 운명을 가를 중대사를 놓고도 개인 성향에 따라 무방하다고 애써 안심하거나 큰일 났다고 불안해 할 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제 맘에 들지 않는 신부들을 핍박하거나 공격하는 정도는 끔찍할 정도다. 교종의 사회적 가르침을 설명하거나 주교회의 정평위가 내놓은 성명서를 소개하려고 해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고함과 욕설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광기를 다독이는 데 필요한 것이 주교의 권위이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반면 페이스북 게시글 하나 때문에 종편들이 난리치자 신부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고 성사집행을 틀어막는 데는 놀라운 민첩함을 보였다. “서품은 주교, 인사는 조선일보” 하는 식의 빈정거림이 세간에 파다하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던 고충을 모를 바 아니지만 그런 대처는 신부들의 의기를 꺾는다. 이래저래 신부들의 강론은 저 세상 이야기뿐이고, 신자들은 성당에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하고 끝낸다. 이것이 현실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그토록 강조하는 예언정신과 복음의 대범함을 한국교회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염된 바다, 흔들리는 민주주의

  가을 월요시국기도회가 시작된다. 적잖은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성당을 내주었다가 많은 신부들이 여태껏 곤욕을 치르고 있으니 기도처를 찾는 일부터 쉽지 않을 것이다. “신부님들이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러십니까?”(마산 창동사거리)하던 상인의 앙칼진 항의, “교회가 어째서 이 모양이 되었느냐?”(인천 주안1동)며 백여 명이나 되는 신부들을 사정없이 꾸짖던 신자의 비난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특히 서울 폐막미사 내내 우리를 괴롭힌 욕설과 저주는 오래토록 잊기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미동도 않고 아스팔트에 앉아 애써 눈 감고 기도하시던 수도자들과 교우들의 엄숙한 표정은 그 모든 것을 보상해줄 만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분들 얼굴에서 우리는 “흔한 사랑이 아니라 압도적인 사랑, 예측 가능한 혁명이 아니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혁명”(김탁환, 소설 ‘사랑과 혁명’)을 위해 인생 전체를 내놓았던 조선천주교회 선배들의 전통을 목격하였다.

청주김인국신부, [2023년 10월 5일 6:15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