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과 김순호, 언더커버의 피 속에 흐르는 변절과 배신의 DNA
<대통령과 경찰국장의 이상한 대학생활>
경찰국장의 과거 이력이 논란입니다.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아래 인노회) 활동 사실을 경찰에 자백한 후 경찰로 특채되었다는 것 입니다.
1989년 2월 인노회는 이적단체로 지정된 후 회원 15명이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부천 지구위원장이자 조직서열 2위였던 김순호는 4월경 갑작스럽게 잠적했다가 6개월 만에 '대공 특채'로 경찰관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첫 부임지는 인노회 사건을 수사한 치안본부 대공수사 3과였습니다.
당시 경찰 조사를 받은 인노회 회원들은 김순호만이 알고 있을 만한 정보를 경찰이 전부 꿰고 있어 내부 밀고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인노회 관계자는 “제가 연행되고 진술을 거부하고 있었는데도, 이미 치안본부가 너무 많은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저희 분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며 “A3용지로 전체 조직도까지 보여주는 걸 보며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알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저도 모르던 것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진술 거부가 무의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상세 조직도도 보여주면서 심문했는데 당시 인노회는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어 조직원들끼리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위 간부의 배신 없이는 이런 정보들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 입니다.
당시 김순호는 대공공작업무 관련자로 분류돼 특채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는 5공 진상조사에서 1983년 강제징집 후에 대공 업무에 활용된 적이 있는 인물로 분류된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1989년 이전부터 프락치 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순호는 강제징집 후 변절해 오랫동안 프락치로 암약하며 노동운동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조직을 통으로 팔아넘겨 경찰이 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노회사건도 공안경찰의 대표적인 조작사건입니다. 인노회는 2020년 4월 대법원 재심 확정 판결에서 이적단체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김순호 국장은 1990년 9월6일과 같은 해 11월15일 범인검거에 공을 세워 내무부 치안본부장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1993년 7월에는 범인검거 유공으로 경찰청장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1994년 12월에는 각각 범인검거와 보안업무 유공을 이유로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김 국장은 대공업무를 맡았던 시기에만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김 국장은 “구체적인 기억은 없고 국가안보 위해 사범 검거다”며 “다만 대통령 표창은 큰 상이어서 기억한다. 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동맹 사건으로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이 된 이후 김순호 국장은 공안사건을 맡아 승승장구했습니다. 마치 영화 <암살>의 염석진이 떠오릅니다.
엄밀히 말하면 윤석열 대통령도 변절자입니다.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의 등에 칼을 꼽고 대통령이 됐습니다. 변절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학시절 모의재판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지금은 전두환이 롤모델이라고 합니다. 변절자는 항상 배신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처럼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변절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변절자 뿐 입니다. 변절자에겐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윤석열은 1980년 5월8일 모의재판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는 먼 친척이 집에 전화를 걸어 피신시키라고 얘기를 했고, 석 달간 강릉에 있는 외가 친척집으로 피신한 뒤 돌아왔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이 정도 사건이면 최소가 강제징집입니다. 하지만 윤석열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그리고 80년대 내내 대학가를 전전하면 술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술과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 타 고시생들에 비해 학습 시간이 짧아' '9수한 윤석열'이 됐다고 하지만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수재가 9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듭니다.
윤석열은 80년대 후반 홍대 근처의 '서교 고시원'에서 서울법대 학생들과 함께 모여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같이 고시원에 다녔던 나경원의 증언으로는 윤석열이 고시원 대장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윤석열의 별명은 ‘신림동 신선’이었습니다.
당시 프락치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졸업 이후에도 특별한 이유없이 대학가 주변을 배회하며 후배들에게 술 사주는 좋은 선배로 기억된다는 것 입니다. 모의재판 이후 윤석열의 비상식적인 대학생활은 의문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윤석열이 김순호를 초대 경찰국장으로 임명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영화 <무간도>처럼 언더커버는 직감적으로 언더커버에게 끌리기 마련입니다. 윤석열의 피 속에 흐르는 변절과 배신의 DNA가 마치 자석처럼 김순호를 끌어 당겼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오래 전부터 둘은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최한욱 정치평론가 페북)